본문 바로가기

구애

그 눈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주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찰나를 원망하고 싶다.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건 아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금방 잊어버릴, 남.


그런 관계를 비집고 들어온 건 너였다. 내가 아니라, 네가. 너는 지나치려는 내 앞을 막아서고 나를 바라봤다. 내 앞에 서서 건넸던 그 인사가 내가 치부했던 우리 사이를 망가트렸다. 단순한 그 인사가. 이 달의 끝까지 나를 벼랑으로 밀고 또 밀어버렸다. 별로 친절하지도 않은 그 무뚝뚝한 인사 한마디가. 나를, 망가트렸다.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았다. 처음 봤던 그 두 눈동자가 생생하다. 똑바로 쳐다보던 그 눈을, 나는 순진하게 쳐다봤었는데. 감정이 생긴 후로는 그게 힘들다. 사실 볼 기회도 없어서 그 눈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처음이 좋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닮은 그 눈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검은 긴 속눈썹이 예뻤다.


착각인 줄 안다. 일부러 오해하고 싶었다. 너는 단 한 번도 헷갈리게 한 적 없는데. 일반적인 그 인사도, 내게 베푸는 호의도. 그날 줬던 그 사탕도. 단순한 호의인데. 알면서도 흔들리는 건 왜일까. 이 정도까지 원하지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이상하게 특별해졌다.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이상하게 좋아졌다.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에 예민해졌다. 사람을 좋아하면 이렇게 되나 보다. 처음 겪는 일이라 새로운 나를 보는 게 당황스럽다. 네 호의를, 나는 오해한다.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닐까. 혹시나 하는 그런 부질없는 기대감을 안고서.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한다. 좋아한다. 많이.


혹시 일시적인 감정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가능성이 없는 것보다 현실성이 없는 것 같아서.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해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물은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너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 나도 너에게 생각보다 궁금한 게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너무 긴장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었을 수도 있고. 생각해보면 너무 억울하다. 내 하루를 다 가져가버렸는데. 내 한 달을 다 빼앗아갔는데. 이름조차 모른다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차라리 이름 석 자라도 알았으면 이 감정이 이렇게 허무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를 부를 수도 없는 현실이 야속하다. 


부정만 하다가 이 감정을 받아들인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한 달을 밤마다 괴로워하면서도 밤마다 생각이 나 미칠 것 같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너를 보자마자, 바보처럼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온 나를 보면서 깨달았다. 내 일상 속에서 너를 만났더라면, 내 주변에 네가 있었다면. 나는 너를 지독히도 사랑했겠구나. 다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봐도 아랑곳 않고 바보처럼 웃던 내가. 나조차도 낯설고 웃겼다. 누군가를 보면서 이렇게 웃음이 날 수도 있구나. 존재만으로 이유 없이 신날 수 있구나. 다만 왜 하필 너를 이곳에서 만나서, 왜 이곳에 네가 있어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도록 아쉬웠다. 다른 사람을 보며 웃는 네 옆모습만 봐도 좋으니 이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곁에 두고두고 너를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 시선을 따라가고 싶었고, 네 발에 맞춰 걷고 싶었다. 눈을 맞추고 너를 알아가고 싶었다. 남들에게는 지독히도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다가가고 싶은데.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러지 못하겠다. 나보다 더 예쁜,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네 곁에 있을 것 같아서. 너라면 충분히 그런 사람을 만날 것 같아서. 사교성 좋은 성격을 가진 네가 없을 리가 없지. 이렇게 스스로 단정 지으면서도 마음이 정리가 안되는 건 내 이기심일까. 그렇다고 네 입으로 그 말을 들으면 너무 비참할 것 같다. 그냥, 내 오해도, 내 감정도 한순간에 다 무너져버릴 테니까. 너를 원했던 내 모든 것 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면 나는 어떡하지.


마지막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는데. 우리는 타이밍이 안 맞다. 첫 만남은 타이밍이, 운이 참 좋았는데. 만나고 싶지 않아도 계속 만날 만큼 우연이 우연이 아니라 인연인 것처럼 계속 마주쳤는데. 이젠 그 과거가 거짓말 같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까. 모르겠다. 나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것 같다. 네 앞에 서서 바보같이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어버버거리겠지. 그때처럼. 이젠 그 운을 다 썼나 보다. 우리가 인연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헛된 희망을 가졌었는데. 그냥 봄바람처럼 잠깐 불고는 사라졌다. 피부에 스친 그 느낌이 선명한데.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찰나의 느낌뿐, 사랑을 할 때 타이밍이 제일 중요하다는데 이제 알겠다. 너와 나는 타이밍이 맞지 않다. 적어도 네 마음이라도 알고 싶은데. 너라는 사람을 알고 싶은데. 그조차도 못할 만큼 타이밍이 좋지 않다. 운이 없다. 역시 되지 못할 사람은 어떻게든 안 되나 보다. 이따위 감정만으로 나는 너를 원할 수도 없나 보다. 어쩌면 지금 이 타이밍에 너를 바라는 것이 내게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타이밍이 다시 맞을 날이 올까.


마지막이었는데. 네 뒷모습만 봤다. 너는 나를 봤을까. 모르겠다. 예전의 너 같지가 않다. 오지랖 넓게 아는 척을 하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다. 마지막을 대충 짐작해서 외면하는 걸까. 나빴다. 네 마음을 모르겠다. 내 손바닥에 올려줬던 그 사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사 가기 전 그 사탕을 사 먹었다. 엄마는 갑자기 사탕은 왜 샀냐고 의아해했다. 평소에 사탕을 한 번도 사 먹은 적이 없는데. 네가 준 그 사탕 때문에 똑같은 사탕을 사서 혼자 먹는다. 바보 같은 짓이다. 스스로가 한심하고 측은하게 느껴진다.


감정이 커질수록 설렘이 컸는데. 이제는 괴롭다. 너를 영영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힌다.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다. 괜찮은 척해도 속으로는 막막해서 미칠 것 같다. 턱 끝까지 차오르던 감정을 다시 꾸역꾸역 삼켜내린다. 너 때문이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이 상황이 너무 야속해서다. 이제서야 알았는데. 이제서야 너를 알았는데.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어져야 한다는 게, 네 일상에 나라는 존재가 조금이라도 있길 바랐던 내 바람이 한순간에 무너져서 그래서 야속한 거다.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뒤늦게 알아버려서. 이제 너를 볼 수도 없는데. 차라리 멀리서 볼 수라도 있으면 덜한데. 이젠 정말 영영 볼 수가 없다. 내 기억 속에서만 네가 존재한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네 모습만이.


언젠가 잊히겠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네가 서서히 잊히겠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렇게 보지 않으면 나도 하루하루 무뎌지겠지. 시작도 하지 않은 관계니까. 엮이지도 않을 관계니까. 지금은 미치도록 괴로운데.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이 지나면 그때는 너를 완전히 잊겠지. 처음부터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네가 붙잡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릴 남과도 같은 사이니까. 다시 볼 수 없는 사이니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가  (0) 2019.04.03
이른 시간에 너무 늦은 생각을 했다.  (0) 2019.03.29
푸념  (0) 2019.03.25
안개  (0) 2019.03.18
겨울  (0) 2019.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