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진다.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적어도 그렇게 사랑했었다고 여기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한 여름의 더위만 남았다. 긴 밤의 열대야만큼 뜨겁게 식을 줄 몰랐었던 사랑이었는데. 감정이 깊고도 질겼다고 생각했는데. 이 달의 끝도 너일거라고 생각하며 내 미련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는데. 감정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너를 자꾸 잊게 된다. 감정의 원인이 너였는데. 그저 감정만이 남아 오랜시간 나를 지배하고 있다. 정신차리니 네가 없다.
통증은 멎지 못했고 그상태로 나는 너를 잊어가고 있다. 행복하지 않다.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끝이 보인다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너를 찾고있다. 기억의 조각이 사라지는 것을 억지로 모으고 모아서 손바닥에 가두고있다. 우습다. 무수한 모래알갱이들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듯 너도 그렇게 빠져나가고 있다. 나는 너를 잡을 수가 없다. 네 이름이라도 붙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기억의 끝자락에 그 이름만 남더라도 좋으니. 신기루가 아니었다고 치부할 수 있는 내 마지막 미련이자 발악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너와 나 사이에는 이렇게 큰 벽이 있을까. 왜 나는 너에게서 큰 벽을 느낄까. 이 벽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나는 계속해서 벽에 대고 소리치는걸 너는 알까. 들리지도 않을 크고 두꺼운 벽에 대고 나는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있는데. 내 존재를 묵살시키고 오로지 너를 보면서 소리치는데. 왜 너는 한 번도 내 눈앞에 나타나서 나를 봐주지 않을까.
서툴게 배운 사랑을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 서툴고 투박한 감정을 드러내어 사랑하고 싶었던 첫 사람이었다.
내 눈을 봤을 너를 기억한다. 나를 보던 너를, 고개를 들어 봤던 네 두 눈을 기억한다. 내 감정을 망가트리고 시간을 가져간 그 두 눈을 기억한다. 그 눈을 봤던 나를 나를 본 너를, 원망한다. 알게된 순간부터 나는 계속해서 너를 원망해왔다. 그 두 눈을 한 번도 미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도 변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아니, 나도 변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하루는 네가 잊혀지는게 아쉬웠고 하루는 너를 기억하는게 끔찍히도 싫을 때가 있었다. 아직도 8월인 지금에도 너를 기억하는 내가 미웠다. 네 두 눈에 지는 내가 싫었다. 또 얼어버리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잠깐 잊어버리면 안도했다. 어떻게 놓을 수 있을까.
언젠가 잊혀지겠지. 언젠가 나는 너를 기억한다해도 아프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나는 내 감정에 너무 많은 날들을 아프게 냈다. 질긴 미련을 더럽다고 느끼니까. 그러면서도 놓지 못해서 괴로우니까. 살을 파고 들어 썩어들어가도 씼을 수 없다. 미련은 그래서 더럽다. 그래서 나쁘다. 사람을 한순간 바보로 만들어버리니까.
오늘은 잊혀져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내일은 어떨지 모르겠다. 오늘은 사랑이 아프지 않았고 사랑이라 불러도 괴롭지 않았다. 되려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치며 느끼는 사무치는 감정에 글을 쓰는 것이 좋다. 네가 없어도 나는 너를 무수히 많은 밤동안 그려냈고 사랑했다. 네가 없는 새벽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날들을 걷고 걸어서 여기까지 닿았다. 평생토록 닿지못할 인연이라해도 어딘가 있을 너를 위로하고 네 아픔이 다 사라지길 바란다. 행복하길, 사랑받길, 사랑하길. 이런 흐려짐이라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기억의 벽이 무너진다해도 네 두 눈을 봤던 그때 그감정은 사라지지않고 영원히 남아 추억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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